
CRT(Cathode Ray Tube / 음극선관)는 1897년 독일의 물리학자인 카를 페르디난트 브라운(Karl Ferdinand Braun)이 발명하여 1937년에 상용화되었습니다.
이렇게 상용화된 CRT TV는 2000년대 중 · 후반까지 주력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후 기술의 발전으로 LCD 등 대체 기술이 완전한 상위 호환으로 떠오르면서 자연히 퇴역하였으며, 이후로도 장비를 쉽게 바꾸기 어려운 산업 현장, 오락실, 또는 극히 일부 가정 등에서는 아직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환경이나 안전 등을 이유로 이미 십수년 전에 생산이 종료된 구식 기술이지만, 여전히 그 동작 원리를 상세히 알아보고 싶으신 분들 또한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CRT가 어떻게 동작하는지, 그리고 CRT 외에는 따라할 수 없는 이점 등에 대하여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CRT의 기초 형태
사실, CRT는 진공관의 형태 중 하나입니다.
깊게 따지고 들어가면 전구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는 있지만, 생략하겠습니다.
진공관은 트랜지스터의 발명 이후로 설 자리를 잃은 듯 했으나, 현 시대에도 여전히 살아남고 있는 분야가 분명히 존재하며, 그 중에는 전문 오디오, 전자레인지가 있습니다.
먼저 CRT의 근간이 되는 진공관 다이오드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내부가 진공인 유리관에는 음극(Cathode)을 담당하는 필라멘트, 그 위에 양극(Anode)을 담당하는 금속판이 있습니다.
이때 음극의 역할을 하거나, 또는 음극을 가열해주는 필라멘트가 충분히 가열되면, 음극에 있던 전자가 양극으로 이동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양극판을 원형 고리의 형태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음극에서 양극으로 전자가 흐르는 건 여전하지만, 앞이 뚫려 있으므로 전자가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 상태에서 유리관을 충분히 넓히고, 앞에 화면을 만든 다음 내부면에 인(Phospor)으로 된 형광체를 도포합니다.
전자총에서 나오는 전자는 가시광선이 아니지만, 이 전자가 앞으로 나아가 형광체를 타격함으로서 가시광선에 해당하는 빛이 발산됩니다.
이로서 CRT의 기초적인 형태가 만들어집니다.
전자를 가속시키기, 그리고 CRT의 위험성
단순히 진공관에 도료만 바른 상태로는 CRT로 활용이 불가능합니다. 이 상태로 전원을 주입하면 그냥 약하게 빛나는 전구가 됩니다.
전자총에서 곧바로 나온 전자는 방사형으로 느리게 뿌려집니다. 이를 빠르고 정교하게 조작하여 하나의 화면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필수 부품이 몇개 더 추가되어야 합니다.

흔히 “CRT에는 고전압이 흘러 위험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CRT TV나 모니터의 메인보드에는 FBT(Fly Back Transformer / 고압 변압기)가 장착됩니다. 이 부품은 최소 수천 V에서 최고 수만V에 달하는 초고전압을 만들어 냅니다.
이 전압이 전자총의 양극 부분에 공급되면, 음극으로부터 발산된 전자 입자가 빛의 약 30% 정도에 달하는 속도로 가속되며, 또한 올바른 세기와 형태로 가공되어 화면으로 나갑니다.

하지만 아무리 전자 빔의 형태가 정교하더라도, 화면까지 도달하는 거리가 일정하지 못하면 흐린 화상이 나타납니다. 이 때문에 어느 위치에 닿아도 그 거리가 일정하게 유지되도록 CRT는 한동안 화면이 볼록했으며, 이후 기술의 발전으로 평면에 가까운 화면이 등장했습니다.

CRT 회로에서 만들어낸 양극은 분해하기 용이하도록 튜브에 청진기처럼 생긴 고무 캡의 형태로 소켓에 장착됩니다. 설명했듯이 최고 수만V에 달하는 초고전압이 공급되기에 손가락을 가까이 가져만 가도 아크 방전이 일어나는 수준이며, 이를 방지하기 위해 고무 캡이 달려 있습니다.
이 양극에 걸리는 초고전압은 CRT를 빠르게 켜기 위해 고전압 커패시터에도 적재됩니다.1 이 때문에 꺼진 상태에서도 감전의 위험이 도사리며, 작업할 때는 반드시 양극을 방전시켜야 합니다.
진공관이 으레 그렇듯이, 전자 빔이 공기 입자와 충돌하여 다시 흩뿌려지면 제대로 된 화상이 만들어지지 않으므로, CRT 내부는 항상 진공 상태를 유지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CRT 제조 공정의 불량으로 인한 폭발 사고가 가끔 있었으며, 나중에는 폭발하더라도 인명 피해를 발생시키지 않도록 비산 방지 유리를 하나 더 덧대어 제조하였습니다.
또한, 전자총에서 발사한 고에너지의 전자 빔이 형광체와 충돌하면서 제동 복사(Bremsstrahlung) 효과로 인해 미량의 X선이 방출됩니다.
CRT는 두꺼운 납유리로 제조되기에 방출되는 X선을 대부분은 차단하지만, 여전히 미량의 X선은 밖으로 빠져나가기 때문에 가까이에서 바라보았을 때 건강에 유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CRT TV를 볼 때는 멀리 떨어져서 봐야 하는 국룰 아닌 국룰이 존재했습니다.
전자의 방향을 조정하기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 상태에서 화면을 키면 단순히 정중앙에 점 하나만이 생깁니다. 이를 사람의 눈으로 봤을 때 하나의 화면으로 보일 수 있게 하려면, 화면의 원하는 곳에 점을 찍게끔 전자 빔을 구부릴 수 있는 부품이 필요합니다.

전자 빔은 자기장으로 방향을 구부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특성을 이용하여 전자 빔을 정교하게 조작하기 위해서는 편향 코일(Deflection Coil, Yoke라고도 함)이 필요합니다.
편향 코일은 구리 코일로 만들어진 전자석으로, CRT의 목 부분에 장착되어 전자 빔이 닿아야 할 위치를 조정합니다.
CRT는 LCD와 다르게 한번에 하나의 화상을 바로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따라서 육안으로 보기에 화면처럼 느껴지도록 TV의 경우 보통 15KHz, 또는 그 이상 매우 빠른 속도로 편향 코일을 조작하여 화상을 만들어 냅니다.
이 가로 주사율과 편향 코일 제조기술의 한계로 인해 코일에서 고주파음이 발생합니다.

편향 코일이 전자 빔을 찍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좌에서 우로 전자 빔을 주사한 뒤 바로 다음 줄로 넘어가는 순차 주사(progressive) 방식입니다.
가로 해상도는 낮지만 또렷한 화상이 표시되고 반응 속도가 빠른 장점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컴퓨터의 화면 표시, 게임 등에 사용됩니다.

다른 하나로는 비월 주사(interlaced) 방식입니다. 좌에서 우로 주사하는 방식은 순차 주사와 같지만, 홀수와 짝수 가로줄로 나뉜 것을 번갈아가며 표시하는 방식입니다.
가로 해상도가 높아지지만, 세로 해상도는 동일하기 때문에 원본 해상도 대비 화상이 약간 흐리며, 반응 속도가 소폭 느려지고, 제품에 따라 화면이 수직으로 약간 흔들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TV 및 동영상에 주로 사용됩니다.

이 두가지 주사 방식은 좌상단부터 우하단까지 가로줄을 그어가면서 화상을 그려나가는 래스터 스캐닝 방식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가로줄을 서로 붙이려고 해도 그 사이에 검은 줄로 된 공백이 남는다는 한계가 있는데, 이를 “스캔 라인“이라고 부릅니다.
과거 게임들은 이러한 CRT의 특성을 이용해 그래픽을 제작하였기 때문에 스캔라인의 유무에 따른 화질 체감 차이가 큰 편입니다.
따라서 대다수의 에뮬레이터에는 LCD와 같은 현세대 디스플레이 환경에서 스캔라인을 재현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컬러는 어떻게 표시하는가?
CRT는 원래 흑백이었습니다.
이후 기술의 발달로 1955년에 최초로 컬러 CRT가 발명된 이래로, 한국 내에서는 1980년대에 컬러 TV 방송을 개시하며 본격적인 보급이 시작되었습니다.

컬러 CRT는 흑백 CRT와 다르게 그 구조가 약간 더 복잡하게 이루어져 있습니다.
빛의 삼원색(RGB)대로 3개의 전자총이 있고, 여기서 발생한 전자 빔이 섀도우 마스크를 통해 필터링되어 알맞은 형광물질에 도달합니다.
형광물질은 색상에 따라 일정한 패턴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3개의 전자총은 각자 다른 각도로 전자 빔을 발사하는데, 전자총 시점에서 일정 각도로 섀도우 마스크를 향할 때 원하는 색상의 형광물질만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색상을 표시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가까이에서 봤을 때 선명도가 떨어져 보이는 단점이 있습니다.
때문에 컴퓨터 또는 소형 모니터의 경우 기술이 발달할 때까지 한동안은 흑백 등의 모노크롬 CRT를 대중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초창기 Macintosh가 흑백 CRT를 고집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CRT만이 가질 수 있는 이점
CRT에는 정해진 해상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LCD에서는 네이티브 해상도를 사용하지 않으면 화상이 스케일링되어 다소 흐릿하게 표시됩니다.
하지만 CRT는 래스터 화면을 송출하는 회로가 완전히 아날로그이기 때문에 지원하는 해상도 내라면 1:1로 뚜렷한 화상을 내보냅니다.
명암비가 뚜렷하다는 장점 또한 있습니다.
LCD 뒤에 있는 백라이트는 화상이 까맣든 아니든 간에 계속 빛을 내기 때문에 블랙 레벨에서 감점을 먹고 들어가지만, CRT는 그냥 검은 부분에 전자 빔을 송출하지 않으면 됩니다.
설명했듯이 CRT는 아날로그 디스플레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의 모든 색상을 섬세하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블랙 레벨이 좋다는 장점은 OLED가 계승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습니다.
CRT는 반응 속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위에서 보듯 전자총에서 쏘아진 전자 빔은 고전압을 공급받는 양극에 의해 빛의 약 30%에 달하는 속도로 가속됩니다.
신호를 아날로그 변환만 거쳐 CRT로 전송하기 때문에 회로에서의 지연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보너스 : CRT로 만들어진 또 다른 디스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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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LCD나 DLP 방식 프로젝터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CRT 프로젝터가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중 삼관식 프로젝터의 경우 서로 다른 색의 CRT를 3개 놓음으로서 섀도우 마스크나 형광물질 패턴이 없어 화질이 매우 우수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CRT 프로젝터는 매우 비쌌고, 밝기가 매우 낮았으며, CRT 자체를 3개나 사용하여 보정 난이도가 하늘 넘어 우주를 뚫는 수준으로 까다로웠습니다.

CRT 프로젝터는 일반 CRT TV나 모니터보다 더 강한 출력을 내고, 그만큼 발열도 매우 심하기 때문에 이로 인한 번인 현상을 최대한 억제하고자 화면에 냉각수 챔버를 장착했습니다.
이 냉각수는 글리콜을 기반으로 적정량의 색소가 섞여 있는데, PC에서 볼 수 있는 수냉 쿨러와는 달리 순환되지 않기 때문에 장시간 방치할 시 내부에 이끼가 자라 화면이 흐려지는 원인이 됩니다.
결국 이후에 등장한 LCD와 DLP 프로젝터에 입지를 추월당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극소수의 레트로 게이머들은 여전히 CRT 프로젝터를 찾기도 합니다.

같은 원리로 만들어진 CRT 프로젝션 TV 또한 존재합니다.
CRT의 화상을 뒤에서 화면을 향해 투사하는 방식으로, 앞에서 설명했던 CRT 프로젝터와 같은 장점을 공유하고, 조금 더 싼 값에 고화질의 대화면을 만들 수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후 가성비가 더 좋은 DLP 방식으로 대체되었다가, PDP 및 LCD의 대형화로 인해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오실로스코프나 초창기 아케이드 게임에는 벡터 방식 CRT가 사용되었습니다.
픽셀과 같은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에 매우 자연스러운 선을 그려낼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정말로 선만 그릴 수 있었기에 표현의 한계가 명확했습니다.
CRT 오실로스코프는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고 있지만, 이 방식의 오실로스코프만을 고집하는 기술자들 또한 존재합니다.
결론
CRT는 이미 생산 및 공식 기술지원이 모두 종료된 디스플레이 기술입니다. 하지만 CRT 특유의 화질이나 특성은 LCD 같은 다른 디스플레이 기술이 대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또한 요새 뜨고 있는 복고풍의 범위가 90년대 내지 00년대로 옮겨가면서 CRT에 맞춰진 컨텐츠를 최고의 화질로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며, CRT 자체의 두껍고 볼록한 형태에서 오는 향수는 많은 사람들을 CRT로 끌어들이기에 충분합니다.
참고가 되셨기를 바라며, 이번 글을 통해 CRT의 동작 방식을 이해하여 향후 CRT를 매입할 때 선택의 폭을 좁혀나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 조금 더 최근에 나온 CRT는 사용하지 않을 때 FBT에 적재된 고전압을 자연히 빼주는 bleeding resistor가 설치되지만, 수십년이 지난 현재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도 다소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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